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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위해 싸운 그들의 이야기 영화 “영웅”

by ssongsunny 2023. 7. 15.

1. 하얼빈의 총성 잊을수 없는 이야기 영화 “영웅” 소개

영화 영웅의 줄거리는 1909년 10월,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뒤 일본 법정의 사형 판결을 받고 순국한 안중근 의사가 거사를 준비하던 때부터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까지 잊을 수 없는 마지막 1년을 담고 있습니다.

1909년 초 안중근은 뜻이 같은 동지 11인과 함께 동의단지를 결성하고 의병으로 재기하기 위해 노력, 이때 왼쪽 손의 약손가락(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끊어 혈서로 결의를 다집니다. 안중근의 수인은 이때부터 찍기 시작한 것입니다.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제국의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콜초프와 회담하기 위해 하얼빈에 오게 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 자원합니다. 안중근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와 함께 하얼빈에 도착합니다. 당초 계획은 동청철도의 출발지인 장춘의 남장춘, 관성자역과 조착지인 하얼빈, 채가구역의 4개 지점에서 암살을 시도하려 했지만 자금과 인력이 부족하여 도착지인 하얼비과 채가구에서 저격하기로 계획을 변경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우덕순과 조도선은 채가구역으로 이동하였고, 안중근은 하얼빈역에서 공격하기로 했지만 채가구역에서의 계획은 이를 수상하게 여긴 러시아 경비병에 의해 실패합니다. 이후 10월 26일 오전 8시, 이토 히로부미가 탄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 그는 러시아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열차 안에서 회담을 가진 후 9시 30분경 러시아 군대의 사열을 받기 위해 하차합니다.

 

안중근은 사열을 마치고 열차로 돌아가던 이토 히로부미를 브라우닝제 반자동권총 M1900으로 저격하였고, 이외에도 일곱 발의 저격 총알 중, 나머지 네 발 중 세 발은 각각 옆에 있던 수행비서관 모리 타이지로우, 하얼빈 주재 일본 제국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남만주 철도의 이사 다나카 세이지로우에게 총격했습니다. 이후 안중근은 가슴 안에 있던 태극기를 높이 들어 올리며 에스페란토 어로 화이팅 이라고 3번 크게 외칩니다. 이 외침은 대한 독립만세라는 뜻이었습니다.

 

이에 안중근은 곧바로 러시아군에 체포되었고, 1차 조사 이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으로 넘겨지게 됩니다. 최재형은 안중근을 일본이 아닌 러시아 제국 법정에서 재판을 받도록 조치하고, 변호사인 미하일로프 주필을 안중근의 변호인으로 준비했지만 안중근이 일본 제국 정부에 넘겨져 관동주 뤼순 감옥에 갇혀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이후 같은해 3월 26일 처형되었으며, 유해는 오늘날 현재까지도 찾지 못했다고 합니다. 함께 거사한 우덕순은 징역 3년, 조도선과 유동하는 각각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습니다.안중근은 체포되어 처형되기까지 재판 과정에서 재판소 내의 어떤 기세에도 굴하지 않고 이토 히로부미를 이유를 당당히 밝혔다고 합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이유 15가지>

첫 번째, 명성황후를 시해한 죄

두 번째, 1905년 11월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든 죄

세 번째, 1907년 정미7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죄

네 번째, 고종황제를 폐위시킨 죄

다섯 번째, 군대를 해산시킨 죄

여섯 번째, 무고한 사람들을 학살한 죄

일곱 번째, 한국인의 권리를 박탈한 죄

여덟 번째, 한국의 교과서를 불태운 죄

아홉 번째, 한국인들을 신문에 기여하지 못하게 한 죄

열 번째, (제일은행) 은행지폐를 강제로 사용한 죄

열한 번째, 한국이 300만 영국 파운드의 빚을 지게 한 죄

열두 번째,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

열세 번째,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정책을 호도한 죄

열네 번째, 일본천황의 아버지인 고메이 천황을 죽인 죄

열다섯 번쨰, 일본과 세계를 속인 죄 등

우리는 영화를 통해 잊지 말아야할 사건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영웅 이라는 영화 모두 봤으면 한다.

 

2.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사건: 역사 속의 암흑

이 사건은 1909년에 일어난 일본 총리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암살 사건입니다.

그럼 함께 이 사건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배경

이토 히로부미는 일제 식민지 지배 시기인 1905년부터 1908년까지 일본 총리로 임명되어 일본의 국정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지지자들은 조선인들을 포함한 여러 민족 그룹으로부터 반대와 적대감을 받았습니다. 특히, 조선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항거하며 독립을 추구하는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암살 계획

이러한 배경 아래, 몇몇 독립운동가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들은 1909년 10월 26일에 하얼빈으로 향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향해 작전을 준비했습니다. 그들은 이토 히로부미가 소묘하기 위해 이동 중인 기차를 표적으로 삼았습니다.

 

사건 발생

1909년 10월 26일, 기차가 하얼빈에 도착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특별한 보호 없이 기차를 내려왔고, 그때 독립운동가 김구는 접근하여 권총을 발사했습니다. 그러나 불운히도 권총은 맞히지 못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경미한 부상을 입었습니다.

 

사건 후

암살 시도 이후, 김구와 그의 동료들은 하얼빈에서 분리되어 망명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조선인들 사이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존경자와 비폭력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훼손시키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그 후로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과 경각심을 가질 것이며, 조선인들은 독립을 위한 노력을 계속해야 했습니다.

 

역사적 의미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향한 암살 시도는 조선인들의 독립 운동 역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국가적인 각오와 결속을 촉진하며, 독립을 향한 투쟁의 의지를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얼빈에서 일어난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은 조선인들의 독립 운동에 대한 열정과 희생을 상징하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우리에게 그들의 투쟁과 희생을 기억하고, 우리의 미래를 위해 역사적인 교훈을 제공해줍니다.